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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족] 권정생의 삶 - 경북 안동

다음에는 2013. 7. 15. 19:51

 예수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에는 작은 예배당 일직교회가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봐도 들판만 펼쳐진 농촌마을입니다. 

 

[일직교회]

 

이 교회를 찾은 건 권정생(1937~2007) 선생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권정생은 1937년 9월. 일본 도쿄의 빈민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땅이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었고, 땅 한 뙈기 없는 그의 부모는 살기 위해 제국의 수도 도쿄로 갔나 봅니다.

1960년대 가난한 농민들이 서울로 와서 빈민촌을 형성한 것과 같은 이유겠지요.

삶은 고달펐을 것이고 일찍 삶의 눈을 뜰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광복이 된 이듬해(1946년) 3월에 두 형들을 일본에 남겨두고 귀국했습니다.

이 땅에 돌아와야 무엇이 달라졌겠습니까?

외가가 있는 청송이나 고향인 안동이나 가난하긴 마찬가지 였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던 해 3월에 국민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담배장수......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19살의 나이에 고생과 영양실조로 얻은 것은 폐결핵과 늑막염이 겹친 병든 몸 뿐이었습니다. 

그 시대의 폐결핵은 죽음의 병이었습니다.

주변에 결핵을 앓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갔습니다.

삶을 의지하기 위해 신앙을 가졌습니다.

 

27살 때(1964년) 고생만 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여동생 결혼의 장애가 되는 그를 다시 내보내야 했습니다.

3달 동안 유리걸식을 하다 돌아오니 아버지도 돌아가신 후였습니다. 

29살(1966년)의 나이에 일직교회의 종지기가 되었습니다.

 

[일직교회 종탑]

 

오른쪽 건물의 끝 방이 권선생이 15년을 살았던 자리입니다.

지금 건물은 새로 지은 것이고 이전 건물은 형편이 없었겠죠.

누추한 방 한 칸이지만 삶의 안정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병세는 조금 나아졌고 교회의 종을 치는 일 외에도 주일학교의 어린이들에게 동화를 들려 주었답니다. 

처음엔 그저 책을 읽어주던 것이 창작동화로 나아 갔답니다.

이 창작동화를 모아 1969년 <강아지 똥>을 출간합니다. 

작가가 된 그는 종치기 생활을 하면서 동화를 씁니다.

<무명저고리와 엄마>는 1975년 신춘문예에 당선됩니다.

 

 

 

"새벽 종소리는 가난하고 소외 받고 아픈 이가 듣고, 벌레며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가 듣는데, 어떻게 따뜻한 손으로 칠 수 있어"

 

추운 겨울에 매일 맨손으로 언 줄을 잡고 종을 치기에 장갑을 선물했더니 한사코 받지 않고 하신 말씀이랍니다.

그리고는 맨손으로 새벽종을 치셨답니다.

작은 것 하나에도 그 기쁨과 아픔을 함께하려했던 실천가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행복은 욕심없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 기도가 끝나 모두 돌아가고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비출 때,

교회 안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바룻바닥에 눈물자국이 얼룩져 있고 그 눈물은 모두 얼어 있었다."

 

하느님을 이용하여 출세와 권력과 돈을 바라는 믿음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하는 믿음과 실천을 권정생은 보여 주었습니다.

 

[권정생이 살던 문간방 벽]

 

35살의 권정생이 종탑 옆 문간방에서 어렵게 글을 쓰던 1971년.

안동에서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이오덕(1925~2003)이 찾아 옵니다.

같은 소띠이지만 이오덕이 열 두살 많았습니다.

두 아동문학가의 만남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편지로 이오덕이 죽기까지 30년 넘게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이오덕 선생은 권정생의 글쓰기를 독려했습니다.

 

[일직교회 목사  일직교회 목사님이 나오셔서 권정생 선생의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권정생 선생이 살았던 집

  

[권정생이 살던 집]

 

1980년대 초.

권정생은 일직교회 종지기를 그만 두고 교회 뒤 고샅길 끝에 있는 5평 남짓한 이 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 불편한 몸으로 1984년 <몽실언니>를 출간합니다.

'사는 거야 어디서 살든 그것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 가가 더 중요'합니다.

내가 살아 온 날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권정생의 흙집]

 

'약탈과 살인으로 살찐 육체보다 성실하게 거둔 곡식으로 깨끗하게 살아가는 정신이야말로 참다운 인간의 길이 아닐까"

 

흙벽에 슬레이트를 얹은 누추한 집입니다.

제대로 된 문패도 아닌 종이에 글씨를 써 비닐을 입힌 이름 석 자가 권정생의 삶의 터였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몽실언니>가 수십만부가 팔려 인세 수입이 상당했을 텐데도 권정생의 삶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더 좋은 집에 살려 하지 않았고, 더 좋은 것을 먹으려 하지 않았고, 더 좋은 옷을 입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종자로 쓰려했던 옥수수였습니다.

권정생 선생이 돌아 가신 후 처마 밑에서 곰팡이가 생겨나고 말았습니다.

 

[권정생의 집 방안]

 

<녹색평론>을 발행하는 김종철 선생의 얘기로는 권정생 선생은 몸이 워낙 좋지 않아 책상에 앉아 글을 쓰지 못했답니다.

자리를 깔고 누워 벽에다 종이를 대고 연필로 또박또박 글을 써나갔다합니다.

권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방 안에는 책 한 권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마당의 부추밭]

 

마당 한 켠에 있는 부추밭. 작은 돌들로 밭의 경계를 표시해 두었습니다.

 

[개집]

 

개 한마리는 키웠습니다.

마당 가운데 개나리 밑에는 쓰러질듯한 개집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바위 하나.

방 안에서 글을 쓰다 바람이라도 쐬일 양이면 저 바위에 걸터 앉았을 겁니다.

 

 

이 집에서 틈틈이 수필도 썼습니다.

대구의 영남대학교에 재직하던 김종철 교수는 그가 운영하던 녹색평론사에서 권정생 선생의 수필을 모아 1996년 <우리들의 하느님>을 출간합니다.

안동이라는 우리나라에서도 보수성이 가장 짙은 지역의 도시도 아닌 농촌에 사는 그가 진보적인 기독교를 이야기 합니다.

 

2008년.

대한민국 국방부는 중세의 교황처럼 금서(禁書)목록을 발표합니다.

그 금서에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느님>이 끼었습니다.

개가 웃을 일이었지요.

권정생이 살아 있었으면 뭐라고 했을까요?

국방부 의도와는 반대로 <우리들의 하느님>은 더 많은 부수가 팔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빌뱅이 언덕]

 

권정생은 말년에 당뇨로도 심한 고생을 하셨나 봅니다.

늘 오줌주머니를 차고 계셨다고 합니다.

가까운 교회에도 나오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쇠했다고 합니다.

2007년 5월 17일.

권정생은 고희를 막 넘긴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유언대로 육신은 화장되어 집 뒤편 빌뱅이 언덕에 뿌려졌습니다.

 

[변소]

 

[권정생 선생 집에서 바라 본 일직교회]

 

"종교는 하느님의 섭리에 따르려는 의지이지, 종교가 요구하는대로 하느님의 섭리를 바꾸는게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예수라는 한 인간의 껍데기가 아니라 그가 고통스럽게 이룩해 놓은 길, 진리, 생명을 이어 몸으로 실천하는 삶이다."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 10억원이 훨씬 넘는 유산을 남겼습니다.

해마다 많은 인세 수입도 있습니다. 

권정생은 대부분의 유산을 북한어린이를 위한 기금으로 남겼습니다.

권정생은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답니다.

시골 버스 기사가 승차를 거부할 정도의 남루한 형색을 하고 살았답니다.

 

권정생이 돌아가신 후, 조탑리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 전국에서도 유명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도 못 알아보았다는 데에 놀라고,

너무나 많은 조문객이 찾아 온 데 놀라고,

그렇게 많은 유산을 남긴 데 놀랐답니다. 

 

권정생도 신(神)으로의 예수보다 인간 예수, 역사적 예수를 따랐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이의 아들로 태어나 멸시와 천대 속에서 드높은 꿈을 꾸며 이를 실천한 지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정생(正生).

그의 이름처럼 바른 삶을 살다 갔습니다.

 

 

슈베르트 가곡집 3 -.. - Standchen(세레나데)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출처 : 구름 가듯 물 흐르듯
글쓴이 : 行雲流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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