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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때에도 웃을 때에도 그대 있었음 - 전 금 숙

다음에는 2013. 9. 8. 04:52

쌀쌀한 날씨 탓인지  . .  3월 하고도 중순이 지났는데도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메마른 모습들이네 . .

5년쯤 전인가, 이 길을 달려서 언니에게 왔던 때가  - ?

길 양쪽으로 나뉘어 있던 목장은 여전한데  풀을 뜯던 소들은 보이지 않아 . . . 

아마 주변의 축사에 웅기중기 모여 있는 모양이지 . .

 

언니 -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언니를 잊은 것은 아니야 . .  

언니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내 마음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간 불쑥 불쑥 그리움이라는 두레박을 타고 내려가  나를 휘저어 놓으니까 

세월이 지나면  그리움도 엷어지는 줄 알았는데

어쩌다  꿈 속에서 언니를 만나 웃고 떠들다 깨어나면  그 사무치는 아쉬움과  서운함을 언니가 알까?

요즘도 가끔  일을 마치고   귀가 길에 일부러 전에 언니가 살던 집을 지나가곤 해 . . 

나무 울타리를 지나 현관에 서서 벨을 누르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다 종종걸음으로 달려나와 

문을 열어주며 환한 얼굴로  어서 와!  하며 반길 것 같아서...

삼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 전 내가 처음 필라델피아에 와서 삼 개월 동안 언니 집에  살았쟎아 . .

봄에는 앞뜰에 철쭉과 도그우드 꽃이 가득 피었고

수영장 있던 뒷 뜰에는 크고 하얀 산 목련이 피어 밤이 되면 그 향기가 이층 침실에까지 풍겨와  내 마음을 설레게 했어 . .  

가끔 어미 너구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나와 수영장의 물을 마시면 우리들은 숨어서 소리 죽여 웃으며 바라보았지 . . 

 언니와 내가 기웃거리며 다니던 다운 타운의 거리들 . . 내가 좋아 하는 불란서 영화를 보여 주려고  찾아 들던 릿츠 극장 . . . 

익숙치 못한 생활에 힘들어 할 때면-  바람 쐬자!  하며 데리고 갔던 뉴져지의 회색 빛 바다 . .

이런 것들은 많은 시간이 흘러 갔음에도  그대로  현존하고 있는데 

단지 언니만 내 곁에 없네 . . .

 

언니 . .  생각나?   내가 이곳에 오고 2년 후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장사할 가게를 사고  문을 연날, 

 언니가 꽃무늬  방석을 들고 내게 왔어. . 

재봉 일을 하려면 엉덩이가 박이지 않고 편해야 된다고 .. 

그 후 그 방석의 겉감이 헤어지고  또 헤어져서  네 번이나 다시 만들어 씌웠지 . .   언니의 손길이 느껴져서  나는 이 방석을 버릴 수가 없었어 . .  

지금도 그 방석을 깔고 앉아 바느질을 하는데

때론,  나도 손님들의 까다로운 바느질을 만나면  꾀가 날 때가 있어.  그 때는 언니 말이 떠올라  다시 생각을 고치고 꼼꼼히 박아 주곤 해 .

언니가 다운 타운에서 레스토랑을 할 때  이런 말을 내게 한 적이 있어 . 

 얘!  나는 이 음식을 만들 때마다 . .  사람들  입맛이나 건강을 생각하며  나름대로 정성껏 만든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던 길이 아닌 그것도 대수롭지 않다고 여긴 일을 하게 되면 푸념이 나오고 불평이 터지게 마련이지 . . 

그런데  언니는 한번도 그런적이 없었어.. . . 늘 삶에 묵묵히 순종하고 최선을 다했지 . .

 

어릴 적부터 우리는 다툰 적이 없었어 . . 

 그것은 언니의 성품이 온유하고  착했기 때문이야 . .  나는 언니가 자랑스러웠어 . .   학교 다닐 때엔 학년 수석은 늘 언니 차지 였고 . .

게다가 언니는 예뻣으니까 S 대학을 나오고 이곳에 유학와서  석사과정을 잘 끝냈어 . . 

박사 과정은  함께 공부하던 형부를 밀어주는 것으로 마음먹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식당일에 뛰어 들었을 때 우린 모두 염려했어 . . 

건강하지도  못한 몸으로 밤마다 닭을 토막치고 다음 날 메뉴를 준비했다더니 . .  

그 닭에서 나온 박테리아가  언니의  폐를  병들게 만들고 말았지 . .  

80년대니까,  그 당시  병원에서도 희귀병이라고 이미 늦어진 상태라고  하며 치료의 진전이 없더니 결국은 산소 호흡기를 의지하게 되었어. .  

우리 가족들은 당사자인 언니보다 더 억울하고 마음이 아파서 형부까지  원망했어 . . 

나중에  형부는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것이 언니의 건강과 바꿀 만큼 귀한 것이었을까? 

그래서 그 박사학위가  자신과 가정에 얼마만한 행복을 가져다 주었을까? 

 

우리들은 삶에서 진정으로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허상을 좇아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허깨비들 같아. .  

어리석은 허깨비 언니는 컨디션이 좀 괜챦은 날은 산소통을 옆에 들고 나를 찾아 왔어 . .  

내가 일하고 있는 것을  지켜 보기도 하고 

언니를 좀 즐겁게 해주려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조용히 웃곤 했어 . .

나중에는 그것도 힘이 들어  병원과 집을 드나들며 많이 아파했을 때,  나는 왜 좀더 언니에게 자주 찾아가 함께 있어주지 못했을까 !

왜 좀더 살가운 동생이  되지 못했을까!  그것이 이날까지  내게 화인처럼 남아 통증으로  도지는 거야,  언니  미안해 !

 

이제 언니가 있는 곳에  거의 다 온 것 같아 . .

집들이 드문 드문해지고  숲이 짙어지는 것을 보니  . .   아  드디어 공원의 묘지들이 보이네 

넓은 초원에  비석들이 보이고 울긋 불긋  조화도 여기저기 놓여 있고  . . .  

먼저 떠난 사람들은 이곳을 다 잊은 채 가버린 것 같은데  남겨진 사람들은 아직도 그리움을 안고 찾아들 오나보아 . .

차에서 내려 걸어 오는데  발밑에  푸릇푸릇 돋아난 잔디들이 밟히고  그 틈 사이로  조그만 풀꽃들도 보여 . .   

그 동안 무덤들이 더 많이 생긴것도 같으네  . .

 

 

   . . . <1939년 태어나서 1991년 떠남> 

 

- 언니가 누워 있는 발치에서 마주 바라 본 비석에 씌어 있듯이 언니는 쉰 두살을 살다 갔지 . .  

 그 사이 언니가 겪었을 인생의 희노애락이 참으로 덧없음을 다시 느끼네 . . .

 

내가 언니의 초청으로 이곳에 오고  다섯 해가 되던 그 해 봄,  4월 - 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 날 . . .

개나리며 목련이며 샤워체리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눈이 부시게 화창한 날이었어 . . 

그 화창함이 내게는 오히려 더 처연하게 느껴지기도 했지 . . 

내 가슴은 이렇게 쓰라린데  세상은 이리도 환하구나 . . 배신감마저 들었어 . .

언니를 고이 묻어 놓고  집에 돌아와 잠깐  눈을 부치고 깨어 났어 . .  이제는 더 이상 언니를  볼 수도 없고 . .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는 확실한 상실감이 큰 바윗덩이처럼 나를 짓눌러 왔어 . .  나는 꼼짝않고  석양빛이 들어오는 마루바닥에  구부리고 앉았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 .  정말 - 정말-  언니는 죽었구나!

 이제 이 미국에  아들하고  나만 남았구나  . . 외롭다고 이곳에 와서 같이 살아가자고 해놓고선 왜 자기는 이렇게 떠나냐 !  하는 푸념이  나왔어 . . 

언니가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용감히 이곳엘 온게 아니었겠어?  

막내로 자란 내가 어릴 적부터  의타심이 많고 외로움을  잘 탓던 것 언니도 잘 알쟎아 . . .  .

 

그래도 또 사람은 살게 마련이어서  그후 많은 날 들이 흘러갔어 . .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하고  시려하면서도 . .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낸 것이지 . .

그러다 보니 용기도 생기고 오기로 버티기도 하며 달려온 게지 . . 

어쩌다 거울을 마주 대하면  거기에는 내가 꿈꾸어 왓던 모습이 아닌  다른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

삶이란 것이  그렇게 의연하게  지혜롭게 세련되게  살아지지가 않더라고 . . 

이곳에서 1세대인 대부분의 우리들은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고 아웃사이더라는 한계선이 있쟎아 . . 모두들 안깐힘을 쓰며 헤쳐가는 것이지 . .

 

그러는 동안,  아들도 어느 사이 자라서 성년이 되었어 . .

방황하는 사춘기도 보내며 대학에 들어가 나를 더나기도 하며  난데없이 비즈니스를 하겠다고 하여 나를 놀래키기도 하면서 . . 

인생의 항해가 다 그러하듯 나와 아들도  때로는  크고 작은 파도를 넘으며 살아왔어 . .

 

그러던 . . 2011년 6월 4일 새벽 아들이 혼수 상태가 되어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어 . .  전날 밤 나는 잠을 자려 했지만 자구 선잠이 들고 마음이 불안하여 뒤척이다 아랫충에 내려와 보니 그 지경이 되어 있는거야 . . .  정신없이 앰블런스를 불러 병원에 갔는데 . . 응급실에서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어 . .  즉시 산소 호훕기를 꽃고 팔에는 서너 개의 주사액이 들어가고 두세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어 . .  그래도 일단 병원에 들어 왔으니까 마음이 좀 놓였지 . .  깨어나지 못하는  아들을 지켜 보다가 의사로부터 정밀검사를 한다는 말을 들었어 . . 검사실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나는 가게에 나와 문을 열었지 . . 어차피 저녁까진 내가 병원에 남아 할 일이 없고 가게에는 내가 처리해야 될일이 있었기 때문에 . . 일을 하면서도 가슴은 계속 울렁거리고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 멍하니 밖을 내다 보곤 했어 . . 

옆에 의논할 가족이 없다는 것이 사무치게 외로웠지 . .

나는 스스로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자 . . 바짝 차리자  다짐했어 . .

 

일을 끝내고 병원엘 가니 아들은 여전히 혼수상태이고 몸은 많이 부어 있었어 . . 의사 말이 간 경화라는 거야 . .  그러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어? 

정신이 아득하고  다리에  힘이 빠져 서 있을 수가 없었지 . .   그런 상태로  3일이 지나고 나니  가끔 눈도 뜨고  나를 알아 보기도 했어 . . 기뻣어 . .

일 주일을 중환자 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고  . . 나는 하루에도 수 없이 기도했지 . . 

아들을 살려 주세요!   아직 살 날이 많은 젊은 나이 쟎아요 . . 그러면 아무 욕심도 내지 않을 께요 . . 

 

언니, 우물 속을 들여다 보듯이 나는 비로소 나의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 볼 수 가 있었어 . .

그러니까 그 동안 가라앉아 있던 나의 추악한 찌꺼기들이 하나하나 떠 오르는 거야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것 - 교만했던것 - 

내 잣대로 아들을 측량하고 힘들게 한것 - 등등 ... 내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져서 그냥 땅 속으로  스며 들어갈 것만  같았어 . . .

 

아들은 점차 깨어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일 주일 후엔 일반 병실로 옮겨졌어 . . 식사 때마다  배식은 되었지만 혼자 거동을 못하는 상태이니 꼭 누가 시중을 들어 주어야만  되었지 . . 나는 하루 종일 가게에서 나갈 수가 없고  일이 끝난 후 저녁7시가 되어야 아들에게 갈 수 있었어 . .

나 없는 동안 아들을 돌보는 간호사들에게 간식을 사 들고 가기도 하며 비위를 맞추었지 . .

열흘 쯤 지나니 아들은 일어나 앉기도 하고 부축하면 화장실도  가곤 했어 . .  한차례 배에서 복수를 빼 내었지만  . . 여전히 배와 팔 다리의 붓기가  내리지 않았어 . .

말도 어눌하고 손놀림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의사는 간 이식을 준비해야 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받아 들이고 싶지 않았지 . .

마음속으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어 . .  단 한 분이 세상 만물을  창조한 분이라면 아들의 병을 낫게 해주시지 않을 까 이런 믿음이 왔어 . . 

병원에 들어오고 12일이 되던 6월 16일,  아들은 퇴원하게 되었어 . . 이제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끝냈으니  재활 치료소로 옮긴 다는 거야 . . .  

 아들은 집으로 돌아 오고 싶어했지만 . . 나는 일을 해야 되고  하루 종일 아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 불가불 재활 치료소로 갈 수 밖에 없었지 . . 

그날 오후 3시쯤 아들은 혼자  앰블런스에 실려 옮겨졌어 . .  그 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려와 . . .

그런데 6시 쯤 ,  아들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어 . .   엄마! 빨리 와 !  나 여기 못 있겠어 !  다시 전에 있던  병원으로 욺겨줘!

 

나는 허둥지둥 가게 문을 닫고 재활 치료소로 달려갔어 . .  

평소 길 눈이 어두운 편인 내가  그날은 별로 헤매지도 않고 주택가에 있는 이층 건물의  재활 치료소를 찾았지 . . 

이층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가르쳐 준 대로  아들이 있는 병실에 들어가 보니 . .   맙소사!  곧 세상을 떠날 것만 같은  두 노인들 가운데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았어 . . 

한 노인은 다리를 절단했는지 . .  붕대에 감긴 채 허공에 짧은 다리가 올려져 있고 다른  노인은 무어라고 계속 웅얼 거리고 있는데

양쪽 천정 가까이에 매달려 있는 TV는 서로 다른  화면의 다른 말들을 쏟아 내고 있었어 . .

시끄럽고 어수선하고 멀쩡한 사람도 누워있으면 정신이 돌아 버릴 것만 같더라고 . .

 

나는 곧 바로 스테이션으로 쫓아가 담당 간호사에게 사정했어 . . 

아들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고 아들의 병은 안정이 필요하니  좀 조용한 병실로 옮겨달라고 . . 

 잠시 후 ,디렉터가 나오더니 내 말에 수긍이 가는지 저녁에  다른 병실이 비게 되니  그리로 옮겨 주겠다는 거야 . . .

9시 쯤 다시 옮겨 준 병실은 2인실인데 훨씨 크고 쾌적했어 . .

룸 메이트인  백인 노인도 조용하고 . . 그제서야  아들도 얼굴 표정이 누그러지고 안도하는 빛이었어 . .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서 10시쯤 아들을  그 곳에 남기고  집에 돌아왔어 . .

자려고 누웠지만  피곤한 몸과는 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 .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왜 이렇게 모든 일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 누르는가?

한 없는 낙담과 자괴감에 휩싸였어 . .  그러나  다음 날 아침 ,  나는 다시 마음을 곧추 세웠지 . .  아냐, 나는 여기서 주저 앉을 수 없지 . . 

 아들은 꼭 좋아지고 모든 것이 다 잘 될 꺼야 . .  틀림없이 그리 될꺼야! . .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말하고 나니 한결  기운이 났어 . .

온 몸이 아파서 거의 하루 종일 누워있는  아들은 혈액의 흐름이 막힐 까봐 매일 허벅지에 주사를  맞았어 . .  다섯 가지의 약을 복용하면서 -  

 나는  일이 끝나면 곧장 아들에게 달려갔고  때로는 아침에도 찾아 갔어 . . .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더워 화씨 백도가 넘나드는 날들이  2주도 더 계속되고 있었어 . . 

아들은 별 차도가 없었고  그렇게 보름 쯤 지났을 때 이번엔 내가 정신을 잃은거야 . . 

 그 날 아침에 아들에게 들린 후 ,  가게에 와서  오전 9시 까지의  일은 기억하는데 깨어보니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어 . . .   저녁 7시가 되어가고 있었지 . .

오전 9시 이후의 시간들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거야 . .  나의 기억에서  지워진 것이지 . . 갑자기 충격이나 스트레스가 심하면 이처럼 일시적 망각증세가 온다는 거야 .. 

그래도 일찍 발견되어  입원하게 되어 다행이었어 . .  아마 감당하기가 힘이 들어서 나는 잠시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었나봐 . . .  

아들과 나는 각기 다른 병원의 병실에 누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일어났지 . .

 

다음 날 퇴원하고,  나는  아들에게 찾아가 병색이 가시지 않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어 . . 

지금까지 내게 살아 올 힘을 준 아들 -  때로는 기쁨도 아픔도 안겨 준 아들 -

어쩌면 아들 편에서도 나에 대한 감정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 .

그럼에도 이 지구상에서 나를 엄마라고 불러 주고  나를 가장 염려할 사람은 이 아들이라는 자명한 사실-  나는 다시금 자신에게 다짐했어 . .

정신을 바짝 차리자 . . 자칫하면 큰일 나겠구나 . .  내가 만일 바른 정신으로 깨어나지 못했으면  이 아들은 어찌 될뻔 했나? 

사람이 정신력만 가지고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구나 . .  

그 다음부터, 나는애써 음식도 챙겨 먹고 심신을 더 건강히 지키려 노력했어 . .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말할 수 없이 따뜻하고 푸근한 기운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워짐을 느꼈어 . . 그리곤 아들이 꼭 회복되리라는 마음이 들었지 . . 

7월에 들어서면서 아들은 휠체어에 앉아 복도나 정원을 드나들게 되었어 . . 오전에  한 차례씩 테라피를 받고 아들은 의욕을 갖고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한 거야 . .  

트레이너는 아침마다 네 바퀴가 달린 보행기를 의지해서 아들을 걷게 했어 . .   때로는 힘이 들어 코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아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했지 . .  

하루 속히 병을 이기려는 의지 였지 . .  절대 안정의 치료 요법이 아니고 운동을 통해 내장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요법이었어 . .

매일 간호사는  아들의 복부 사이즈를 재고 아들과 나는 그 사이즈에 따라 기분이 바뀌곤 했지 . .

7월 21일에 다시 전에 입원했던 병원에 들어가 두 번째 복수를 빼었어 . .

110 센치가 되는 배 사이즈는  그다지 줄지 않았지만  아들은 이제 혼자 보행기에 의지해서 다니게 되었어 . . 

점차 아들이 회복되어가자  재활원에서 퇴원을 권하고 아들도 집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원했어 . . .

 어느 정도  거동할 수 있으니 집에 와서 생활하는 것이 여러모로  아들에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지 . . 

아들이 입원하고 있는 동안 나는 십오년 가까이 살아 온 집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를 했어 . . 여러가지 형편상 나는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지 . . . 

처음 그 집을 사고  아들과 나는 많이 좋아 했는데 . .  이런저런 추억이 있는 집이었는데 . . . 

그러나 언니,  아들의 생명 앞에서 이런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어?

 

7월 29일-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내렸어 . . 드디어 그 날 오후 늦게 아들은 퇴원하고 집으로 오게 되었지 . .

전날 밤, 집에 오게 되는 것이 기뻐서  아들은 잠도 안 자고  짐을 싸놓은 거야 . . 짐이라고 해야  속옷과  겉옷 몇 가지와 집에서 가져 간  담요 같은 것이었지 . .  

살던 장소가  바뀌었지만  자기 방에 들어 간  아들은 좋아서  눈물을 글썽이었어  . .    나름대로 여러가지 감회가 있었겠지 . . 

나도 한 시름이 놓였어 . .  다음 날부터 간호사와 트레이너가 찾아와  1시간 씩 검진을 하고  운동을 시키고 돌아 갔어 . . .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누구 방해 받지 않고 쉬니까  아들은 하루 하루 호전되어 갔지 . .

 

언니 -

노벨 상을 받은 케르테스 임례라는 유태인 헝가리 작가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어 . . 그 가 열 두살 이었을 때  유태인 포로 수용소에 1년여  갇혀 있었는데 . . 

고통이 가득한 그 곳에서도 아픔이 멈추는 순간에는 무언가 행복 비슷한 것이 존재했다는 거야 . . . .  

그에 견 줄 바는 아니지만  아들과 나는 많이 힘든 중에도  때론 그런 순간들을 느낄 수가 있었어 . .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아주 작은 평범한 상황에도 감사하게 된 것이지 . . .

 

9월에 들어서면서  간호사와 트레이너의 방문치료도 끝났어 . .  아들은 매일 혼자  두세 시간씩 열심히 운동을 했어 . .  계단 오르내리기, 팔 굽혀펴기,  아령 들기 등등. .

9월 말쯤 .  . 아들의 배 둘레를 재보닌 거의 정상인에 가까운 88 센치. .  그러니까  34인치가 된 거야 . . .  아들과 나는 환호성을 질렀지 . . 

 

10월초 . .  새로 옮긴 병원의 담당 의사를 만났는데 아주 빠른 회복이라고  놀란 듯이 말했어 . .   복용하던 약들의 종류와 양도 줄여 주었어 . .

그러나 6개월마다 피검사와 울트라사운드 는 계속해야 된다는 거야 . .  

그날 병원을 나서는데  내 마음이 하늘을 날아 오르는 듯 했어 . .

점차 아들은 운동 범위를 넓혀 가까운 거리를 걷기도 하고 동네 후드마켓에 가서 식료품을 사와 간단한 점심도 만들어 먹기도 했지 . .

때로는, 아들과 함께  타운의 도서관에 가서  책도 읽으며  오랜 만에 공통된 여가 시간을 갖기도 했어. . . . 

 

언니 . .  추수 감사절이 되었을 때, 나는 지난 6개월을 돌아 보았어 . . 

숨 가쁘게  정신 없이 지나 오는 동안  지친 나를 위로해 주고  힘을 북돋아 준 분들과

아들의 병실을 찾아와 서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 준 분들의 얼굴이 떠 올랐지 . . 

그들의 사랑과 기도가 없었다면 . .  내가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 . . 

이 사랑의 빚을 갚아 가려면  아들과 나는 아마도  오래 살아야 겠지?

 

그 겨울이 지나고,  지난  한 해를 더 보내면서  아들은 두 번의 정기 검사를 받았고  이제는 거의 정상에 가깝게 건강이 회복되고 있어 . .

지금은 자신의 앞날을 위해 건강에 무리가 되지 않을 일도 준비하고 있고  요즘 아들과 나는 자주 웃고  많이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어 . .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온갖 염려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니  마음이 평안해 . . .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과 나를 지켜 주는 분의 손길을 느끼니까  든든한 거야 . . . . . .

 

오늘 . . 이렇게 언니를 찾아와 밀린 이야기를  풀어 놓으니 . . .  한결 모든 것이 더 정리가 되네 . . . 

내가 이제 바라는 것은  아들이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필요한 다른 이들에게  나누며 건강히 살아 가는 것이지 . .   종종 자신의 삶을 점검하면서 말야 . .  .

 

언니 -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야 . .  더욱이 누구에게인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 갈 수 잇다는 것은  더 큰 축복이고 . . . 

 아들과 내가 이런 축복을 많이 누리며 살아가고 싶어 . . .

 

바람이 불기 시작하네 . .  아직은 이른 봄이라 아침 저녁으론 쌀쌀해 . .  이제 일어나서  돌아 갈 채비를 해야 겠어 . . 

자주 찾아 오지 못해도  언니는 항상 내 가슴에 살아있음을 알고 있지?

 

언제나 다정했던 언니야 . .   사랑하는 나의 언니야 . . .  .  

이젠 그만  갈께 ,    안녕 !

 

 

 

////뉴욕한국일보 <2013년 생활 수기> 쓴 이 - 전금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