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날씨 탓인지 . . 3월 하고도 중순이 지났는데도 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은 메마른 모습들이네 . .
5년쯤 전인가, 이 길을 달려서 언니에게 왔던 때가 - ?
길 양쪽으로 나뉘어 있던 목장은 여전한데 풀을 뜯던 소들은 보이지 않아 . . .
아마 주변의 축사에 웅기중기 모여 있는 모양이지 . .
언니 - 오랫동안 찾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언니를 잊은 것은 아니야 . .
언니와 함께 했던 모든 것들이 내 마음 저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간 불쑥 불쑥 그리움이라는 두레박을 타고 내려가 나를 휘저어 놓으니까
세월이 지나면 그리움도 엷어지는 줄 알았는데
어쩌다 꿈 속에서 언니를 만나 웃고 떠들다 깨어나면 그 사무치는 아쉬움과 서운함을 언니가 알까?
요즘도 가끔 일을 마치고 귀가 길에 일부러 전에 언니가 살던 집을 지나가곤 해 . .
나무 울타리를 지나 현관에 서서 벨을 누르면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다 종종걸음으로 달려나와
문을 열어주며 환한 얼굴로 어서 와! 하며 반길 것 같아서...
삼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 전 내가 처음 필라델피아에 와서 삼 개월 동안 언니 집에 살았쟎아 . .
봄에는 앞뜰에 철쭉과 도그우드 꽃이 가득 피었고
수영장 있던 뒷 뜰에는 크고 하얀 산 목련이 피어 밤이 되면 그 향기가 이층 침실에까지 풍겨와 내 마음을 설레게 했어 . .
가끔 어미 너구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나와 수영장의 물을 마시면 우리들은 숨어서 소리 죽여 웃으며 바라보았지 . .
언니와 내가 기웃거리며 다니던 다운 타운의 거리들 . . 내가 좋아 하는 불란서 영화를 보여 주려고 찾아 들던 릿츠 극장 . . .
익숙치 못한 생활에 힘들어 할 때면- 바람 쐬자! 하며 데리고 갔던 뉴져지의 회색 빛 바다 . .
이런 것들은 많은 시간이 흘러 갔음에도 그대로 현존하고 있는데
단지 언니만 내 곁에 없네 . . .
언니 . . 생각나? 내가 이곳에 오고 2년 후 ..세상 태어나 처음으로 장사할 가게를 사고 문을 연날,
언니가 꽃무늬 방석을 들고 내게 왔어. .
재봉 일을 하려면 엉덩이가 박이지 않고 편해야 된다고 ..
그 후 그 방석의 겉감이 헤어지고 또 헤어져서 네 번이나 다시 만들어 씌웠지 . . 언니의 손길이 느껴져서 나는 이 방석을 버릴 수가 없었어 . .
지금도 그 방석을 깔고 앉아 바느질을 하는데
때론, 나도 손님들의 까다로운 바느질을 만나면 꾀가 날 때가 있어. 그 때는 언니 말이 떠올라 다시 생각을 고치고 꼼꼼히 박아 주곤 해 .
언니가 다운 타운에서 레스토랑을 할 때 이런 말을 내게 한 적이 있어 .
얘! 나는 이 음식을 만들 때마다 . . 사람들 입맛이나 건강을 생각하며 나름대로 정성껏 만든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던 길이 아닌 그것도 대수롭지 않다고 여긴 일을 하게 되면 푸념이 나오고 불평이 터지게 마련이지 . .
그런데 언니는 한번도 그런적이 없었어.. . . 늘 삶에 묵묵히 순종하고 최선을 다했지 . .
어릴 적부터 우리는 다툰 적이 없었어 . .
그것은 언니의 성품이 온유하고 착했기 때문이야 . . 나는 언니가 자랑스러웠어 . . 학교 다닐 때엔 학년 수석은 늘 언니 차지 였고 . .
게다가 언니는 예뻣으니까 S 대학을 나오고 이곳에 유학와서 석사과정을 잘 끝냈어 . .
박사 과정은 함께 공부하던 형부를 밀어주는 것으로 마음먹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식당일에 뛰어 들었을 때 우린 모두 염려했어 . .
건강하지도 못한 몸으로 밤마다 닭을 토막치고 다음 날 메뉴를 준비했다더니 . .
그 닭에서 나온 박테리아가 언니의 폐를 병들게 만들고 말았지 . .
80년대니까, 그 당시 병원에서도 희귀병이라고 이미 늦어진 상태라고 하며 치료의 진전이 없더니 결국은 산소 호흡기를 의지하게 되었어. .
우리 가족들은 당사자인 언니보다 더 억울하고 마음이 아파서 형부까지 원망했어 . .
나중에 형부는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것이 언니의 건강과 바꿀 만큼 귀한 것이었을까?
그래서 그 박사학위가 자신과 가정에 얼마만한 행복을 가져다 주었을까?
우리들은 삶에서 진정으로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허상을 좇아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허깨비들 같아. .
어리석은 허깨비 언니는 컨디션이 좀 괜챦은 날은 산소통을 옆에 들고 나를 찾아 왔어 . .
내가 일하고 있는 것을 지켜 보기도 하고
언니를 좀 즐겁게 해주려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조용히 웃곤 했어 . .
나중에는 그것도 힘이 들어 병원과 집을 드나들며 많이 아파했을 때, 나는 왜 좀더 언니에게 자주 찾아가 함께 있어주지 못했을까 !
왜 좀더 살가운 동생이 되지 못했을까! 그것이 이날까지 내게 화인처럼 남아 통증으로 도지는 거야, 언니 미안해 !
이제 언니가 있는 곳에 거의 다 온 것 같아 . .
집들이 드문 드문해지고 숲이 짙어지는 것을 보니 . . 아 드디어 공원의 묘지들이 보이네
넓은 초원에 비석들이 보이고 울긋 불긋 조화도 여기저기 놓여 있고 . . .
먼저 떠난 사람들은 이곳을 다 잊은 채 가버린 것 같은데 남겨진 사람들은 아직도 그리움을 안고 찾아들 오나보아 . .
차에서 내려 걸어 오는데 발밑에 푸릇푸릇 돋아난 잔디들이 밟히고 그 틈 사이로 조그만 풀꽃들도 보여 . .
그 동안 무덤들이 더 많이 생긴것도 같으네 . .
. . . <1939년 태어나서 1991년 떠남>
- 언니가 누워 있는 발치에서 마주 바라 본 비석에 씌어 있듯이 언니는 쉰 두살을 살다 갔지 . .
그 사이 언니가 겪었을 인생의 희노애락이 참으로 덧없음을 다시 느끼네 . . .
내가 언니의 초청으로 이곳에 오고 다섯 해가 되던 그 해 봄, 4월 - 언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 날 . . .
개나리며 목련이며 샤워체리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눈이 부시게 화창한 날이었어 . .
그 화창함이 내게는 오히려 더 처연하게 느껴지기도 했지 . .
내 가슴은 이렇게 쓰라린데 세상은 이리도 환하구나 . . 배신감마저 들었어 . .
언니를 고이 묻어 놓고 집에 돌아와 잠깐 눈을 부치고 깨어 났어 . . 이제는 더 이상 언니를 볼 수도 없고 . .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다는 확실한 상실감이 큰 바윗덩이처럼 나를 짓눌러 왔어 . . 나는 꼼짝않고 석양빛이 들어오는 마루바닥에 구부리고 앉았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 . 정말 - 정말- 언니는 죽었구나!
이제 이 미국에 아들하고 나만 남았구나 . . 외롭다고 이곳에 와서 같이 살아가자고 해놓고선 왜 자기는 이렇게 떠나냐 ! 하는 푸념이 나왔어 . .
언니가 있었기 때문에 나 혼자 어린 아들을 데리고 용감히 이곳엘 온게 아니었겠어?
막내로 자란 내가 어릴 적부터 의타심이 많고 외로움을 잘 탓던 것 언니도 잘 알쟎아 . . . .
그래도 또 사람은 살게 마련이어서 그후 많은 날 들이 흘러갔어 . . 가슴에 구멍이 난 것처럼 허전하고 시려하면서도 . .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힘을 낸 것이지 . .
그러다 보니 용기도 생기고 오기로 버티기도 하며 달려온 게지 . .
어쩌다 거울을 마주 대하면 거기에는 내가 꿈꾸어 왓던 모습이 아닌 다른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 .
삶이란 것이 그렇게 의연하게 지혜롭게 세련되게 살아지지가 않더라고 . .
이곳에서 1세대인 대부분의 우리들은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고 아웃사이더라는 한계선이 있쟎아 . . 모두들 안깐힘을 쓰며 헤쳐가는 것이지 . .
그러는 동안, 아들도 어느 사이 자라서 성년이 되었어 . .
방황하는 사춘기도 보내며 대학에 들어가 나를 더나기도 하며 난데없이 비즈니스를 하겠다고 하여 나를 놀래키기도 하면서 . .
인생의 항해가 다 그러하듯 나와 아들도 때로는 크고 작은 파도를 넘으며 살아왔어 . .
그러던 . . 2011년 6월 4일 새벽 아들이 혼수 상태가 되어 누워있는 것을 발견했어 . . 전날 밤 나는 잠을 자려 했지만 자구 선잠이 들고 마음이 불안하여 뒤척이다 아랫충에 내려와 보니 그 지경이 되어 있는거야 . . . 정신없이 앰블런스를 불러 병원에 갔는데 . . 응급실에서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졌어 . . 즉시 산소 호훕기를 꽃고 팔에는 서너 개의 주사액이 들어가고 두세시간이 빠르게 지나갔어 . . 그래도 일단 병원에 들어 왔으니까 마음이 좀 놓였지 . . 깨어나지 못하는 아들을 지켜 보다가 의사로부터 정밀검사를 한다는 말을 들었어 . . 검사실로 옮겨지는 것을 보고 나는 가게에 나와 문을 열었지 . . 어차피 저녁까진 내가 병원에 남아 할 일이 없고 가게에는 내가 처리해야 될일이 있었기 때문에 . . 일을 하면서도 가슴은 계속 울렁거리고 내가 지금 무슨 일을 당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 멍하니 밖을 내다 보곤 했어 . .
옆에 의논할 가족이 없다는 것이 사무치게 외로웠지 . .
나는 스스로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자 . . 바짝 차리자 다짐했어 . .
일을 끝내고 병원엘 가니 아들은 여전히 혼수상태이고 몸은 많이 부어 있었어 . . 의사 말이 간 경화라는 거야 . . 그러니 내가 얼마나 놀랐겠어?
정신이 아득하고 다리에 힘이 빠져 서 있을 수가 없었지 . . 그런 상태로 3일이 지나고 나니 가끔 눈도 뜨고 나를 알아 보기도 했어 . . 기뻣어 . .
일 주일을 중환자 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고 . . 나는 하루에도 수 없이 기도했지 . .
아들을 살려 주세요! 아직 살 날이 많은 젊은 나이 쟎아요 . . 그러면 아무 욕심도 내지 않을 께요 . .
언니, 우물 속을 들여다 보듯이 나는 비로소 나의 깊숙한 내면을 들여다 볼 수 가 있었어 . .
그러니까 그 동안 가라앉아 있던 나의 추악한 찌꺼기들이 하나하나 떠 오르는 거야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알게 모르게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한것 - 교만했던것 -
내 잣대로 아들을 측량하고 힘들게 한것 - 등등 ... 내 존재가 한없이 작아지고 작아져서 그냥 땅 속으로 스며 들어갈 것만 같았어 . . .
아들은 점차 깨어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일 주일 후엔 일반 병실로 옮겨졌어 . . 식사 때마다 배식은 되었지만 혼자 거동을 못하는 상태이니 꼭 누가 시중을 들어 주어야만 되었지 . . 나는 하루 종일 가게에서 나갈 수가 없고 일이 끝난 후 저녁7시가 되어야 아들에게 갈 수 있었어 . .
나 없는 동안 아들을 돌보는 간호사들에게 간식을 사 들고 가기도 하며 비위를 맞추었지 . .
열흘 쯤 지나니 아들은 일어나 앉기도 하고 부축하면 화장실도 가곤 했어 . . 한차례 배에서 복수를 빼 내었지만 . . 여전히 배와 팔 다리의 붓기가 내리지 않았어 . .
말도 어눌하고 손놀림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의사는 간 이식을 준비해야 된다고 했지만 나는 그 말을 받아 들이고 싶지 않았지 . .
마음속으로 세차게 고개를 저었어 . . 단 한 분이 세상 만물을 창조한 분이라면 아들의 병을 낫게 해주시지 않을 까 이런 믿음이 왔어 . .
병원에 들어오고 12일이 되던 6월 16일, 아들은 퇴원하게 되었어 . . 이제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치료는 다 끝냈으니 재활 치료소로 옮긴 다는 거야 . . .
아들은 집으로 돌아 오고 싶어했지만 . . 나는 일을 해야 되고 하루 종일 아들을 돌봐 줄 사람이 없으니 불가불 재활 치료소로 갈 수 밖에 없었지 . .
그날 오후 3시쯤 아들은 혼자 앰블런스에 실려 옮겨졌어 . . 그 때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려와 . . .
그런데 6시 쯤 , 아들이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내게 전화를 했어 . . 엄마! 빨리 와 ! 나 여기 못 있겠어 ! 다시 전에 있던 병원으로 욺겨줘!
나는 허둥지둥 가게 문을 닫고 재활 치료소로 달려갔어 . .
평소 길 눈이 어두운 편인 내가 그날은 별로 헤매지도 않고 주택가에 있는 이층 건물의 재활 치료소를 찾았지 . .
이층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가르쳐 준 대로 아들이 있는 병실에 들어가 보니 . . 맙소사! 곧 세상을 떠날 것만 같은 두 노인들 가운데에 누워있는 아들을 보았어 . .
한 노인은 다리를 절단했는지 . . 붕대에 감긴 채 허공에 짧은 다리가 올려져 있고 다른 노인은 무어라고 계속 웅얼 거리고 있는데
양쪽 천정 가까이에 매달려 있는 TV는 서로 다른 화면의 다른 말들을 쏟아 내고 있었어 . .
시끄럽고 어수선하고 멀쩡한 사람도 누워있으면 정신이 돌아 버릴 것만 같더라고 . .
나는 곧 바로 스테이션으로 쫓아가 담당 간호사에게 사정했어 . .
아들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겠다고 한다고 아들의 병은 안정이 필요하니 좀 조용한 병실로 옮겨달라고 . .
잠시 후 ,디렉터가 나오더니 내 말에 수긍이 가는지 저녁에 다른 병실이 비게 되니 그리로 옮겨 주겠다는 거야 . . .
9시 쯤 다시 옮겨 준 병실은 2인실인데 훨씨 크고 쾌적했어 . .
룸 메이트인 백인 노인도 조용하고 . . 그제서야 아들도 얼굴 표정이 누그러지고 안도하는 빛이었어 . .
나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져서 10시쯤 아들을 그 곳에 남기고 집에 돌아왔어 . .
자려고 누웠지만 피곤한 몸과는 달리 잠을 이룰 수가 없었어 . .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왜 이렇게 모든 일이 한꺼번에 나를 덮쳐 누르는가?
한 없는 낙담과 자괴감에 휩싸였어 . . 그러나 다음 날 아침 , 나는 다시 마음을 곧추 세웠지 . . 아냐, 나는 여기서 주저 앉을 수 없지 . .
아들은 꼭 좋아지고 모든 것이 다 잘 될 꺼야 . . 틀림없이 그리 될꺼야! . .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말하고 나니 한결 기운이 났어 . .
온 몸이 아파서 거의 하루 종일 누워있는 아들은 혈액의 흐름이 막힐 까봐 매일 허벅지에 주사를 맞았어 . . 다섯 가지의 약을 복용하면서 -
나는 일이 끝나면 곧장 아들에게 달려갔고 때로는 아침에도 찾아 갔어 . . .
그 해 여름은, 유난히 더워 화씨 백도가 넘나드는 날들이 2주도 더 계속되고 있었어 . .
아들은 별 차도가 없었고 그렇게 보름 쯤 지났을 때 이번엔 내가 정신을 잃은거야 . .
그 날 아침에 아들에게 들린 후 , 가게에 와서 오전 9시 까지의 일은 기억하는데 깨어보니내가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어 . . . 저녁 7시가 되어가고 있었지 . .
오전 9시 이후의 시간들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거야 . . 나의 기억에서 지워진 것이지 . . 갑자기 충격이나 스트레스가 심하면 이처럼 일시적 망각증세가 온다는 거야 ..
그래도 일찍 발견되어 입원하게 되어 다행이었어 . . 아마 감당하기가 힘이 들어서 나는 잠시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었나봐 . . .
아들과 나는 각기 다른 병원의 병실에 누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이 일어났지 . .
다음 날 퇴원하고, 나는 아들에게 찾아가 병색이 가시지 않고 있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어 . .
지금까지 내게 살아 올 힘을 준 아들 - 때로는 기쁨도 아픔도 안겨 준 아들 -
어쩌면 아들 편에서도 나에 대한 감정이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 . .
그럼에도 이 지구상에서 나를 엄마라고 불러 주고 나를 가장 염려할 사람은 이 아들이라는 자명한 사실- 나는 다시금 자신에게 다짐했어 . .
정신을 바짝 차리자 . . 자칫하면 큰일 나겠구나 . . 내가 만일 바른 정신으로 깨어나지 못했으면 이 아들은 어찌 될뻔 했나?
사람이 정신력만 가지고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구나 . .
그 다음부터, 나는애써 음식도 챙겨 먹고 심신을 더 건강히 지키려 노력했어 . .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말할 수 없이 따뜻하고 푸근한 기운이 내 가슴을 가득 채워짐을 느꼈어 . . 그리곤 아들이 꼭 회복되리라는 마음이 들었지 . .
7월에 들어서면서 아들은 휠체어에 앉아 복도나 정원을 드나들게 되었어 . . 오전에 한 차례씩 테라피를 받고 아들은 의욕을 갖고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한 거야 . .
트레이너는 아침마다 네 바퀴가 달린 보행기를 의지해서 아들을 걷게 했어 . . 때로는 힘이 들어 코피를 흘리기도 했지만 아들은 하루도 쉬지 않고 계속했지 . .
하루 속히 병을 이기려는 의지 였지 . . 절대 안정의 치료 요법이 아니고 운동을 통해 내장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요법이었어 . .
매일 간호사는 아들의 복부 사이즈를 재고 아들과 나는 그 사이즈에 따라 기분이 바뀌곤 했지 . .
7월 21일에 다시 전에 입원했던 병원에 들어가 두 번째 복수를 빼었어 . .
110 센치가 되는 배 사이즈는 그다지 줄지 않았지만 아들은 이제 혼자 보행기에 의지해서 다니게 되었어 . .
점차 아들이 회복되어가자 재활원에서 퇴원을 권하고 아들도 집으로 돌아오길 간절히 원했어 . . .
어느 정도 거동할 수 있으니 집에 와서 생활하는 것이 여러모로 아들에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지 . .
아들이 입원하고 있는 동안 나는 십오년 가까이 살아 온 집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를 했어 . . 여러가지 형편상 나는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지 . . .
처음 그 집을 사고 아들과 나는 많이 좋아 했는데 . . 이런저런 추억이 있는 집이었는데 . . .
그러나 언니, 아들의 생명 앞에서 이런 것이 무에 그리 중요하겠어?
7월 29일- 천둥 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내렸어 . . 드디어 그 날 오후 늦게 아들은 퇴원하고 집으로 오게 되었지 . .
전날 밤, 집에 오게 되는 것이 기뻐서 아들은 잠도 안 자고 짐을 싸놓은 거야 . . 짐이라고 해야 속옷과 겉옷 몇 가지와 집에서 가져 간 담요 같은 것이었지 . .
살던 장소가 바뀌었지만 자기 방에 들어 간 아들은 좋아서 눈물을 글썽이었어 . . 나름대로 여러가지 감회가 있었겠지 . .
나도 한 시름이 놓였어 . . 다음 날부터 간호사와 트레이너가 찾아와 1시간 씩 검진을 하고 운동을 시키고 돌아 갔어 . . .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누구 방해 받지 않고 쉬니까 아들은 하루 하루 호전되어 갔지 . .
언니 -
노벨 상을 받은 케르테스 임례라는 유태인 헝가리 작가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어 . . 그 가 열 두살 이었을 때 유태인 포로 수용소에 1년여 갇혀 있었는데 . .
고통이 가득한 그 곳에서도 아픔이 멈추는 순간에는 무언가 행복 비슷한 것이 존재했다는 거야 . . . .
그에 견 줄 바는 아니지만 아들과 나는 많이 힘든 중에도 때론 그런 순간들을 느낄 수가 있었어 . .
혹독한 시련을 겪으면서 아주 작은 평범한 상황에도 감사하게 된 것이지 . . .
9월에 들어서면서 간호사와 트레이너의 방문치료도 끝났어 . . 아들은 매일 혼자 두세 시간씩 열심히 운동을 했어 . . 계단 오르내리기, 팔 굽혀펴기, 아령 들기 등등. .
9월 말쯤 . . 아들의 배 둘레를 재보닌 거의 정상인에 가까운 88 센치. . 그러니까 34인치가 된 거야 . . . 아들과 나는 환호성을 질렀지 . .
10월초 . . 새로 옮긴 병원의 담당 의사를 만났는데 아주 빠른 회복이라고 놀란 듯이 말했어 . . 복용하던 약들의 종류와 양도 줄여 주었어 . .
그러나 6개월마다 피검사와 울트라사운드 는 계속해야 된다는 거야 . .
그날 병원을 나서는데 내 마음이 하늘을 날아 오르는 듯 했어 . .
점차 아들은 운동 범위를 넓혀 가까운 거리를 걷기도 하고 동네 후드마켓에 가서 식료품을 사와 간단한 점심도 만들어 먹기도 했지 . .
때로는, 아들과 함께 타운의 도서관에 가서 책도 읽으며 오랜 만에 공통된 여가 시간을 갖기도 했어. . . .
언니 . . 추수 감사절이 되었을 때, 나는 지난 6개월을 돌아 보았어 . .
숨 가쁘게 정신 없이 지나 오는 동안 지친 나를 위로해 주고 힘을 북돋아 준 분들과
아들의 병실을 찾아와 서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내 준 분들의 얼굴이 떠 올랐지 . .
그들의 사랑과 기도가 없었다면 . . 내가 얼마나 얼마나 힘들었을까? . . .
이 사랑의 빚을 갚아 가려면 아들과 나는 아마도 오래 살아야 겠지?
그 겨울이 지나고, 지난 한 해를 더 보내면서 아들은 두 번의 정기 검사를 받았고 이제는 거의 정상에 가깝게 건강이 회복되고 있어 . .
지금은 자신의 앞날을 위해 건강에 무리가 되지 않을 일도 준비하고 있고 요즘 아들과 나는 자주 웃고 많이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어 . .
그렇다고 세상살이의 온갖 염려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니 마음이 평안해 . . .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들과 나를 지켜 주는 분의 손길을 느끼니까 든든한 거야 . . . . . .
오늘 . . 이렇게 언니를 찾아와 밀린 이야기를 풀어 놓으니 . . . 한결 모든 것이 더 정리가 되네 . . .
내가 이제 바라는 것은 아들이 자신이 받았던 사랑을 필요한 다른 이들에게 나누며 건강히 살아 가는 것이지 . . 종종 자신의 삶을 점검하면서 말야 . . .
언니 - 살아 있다는 것은 축복이야 . . 더욱이 누구에게인가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 갈 수 잇다는 것은 더 큰 축복이고 . . .
아들과 내가 이런 축복을 많이 누리며 살아가고 싶어 . . .
바람이 불기 시작하네 . . 아직은 이른 봄이라 아침 저녁으론 쌀쌀해 . . 이제 일어나서 돌아 갈 채비를 해야 겠어 . .
자주 찾아 오지 못해도 언니는 항상 내 가슴에 살아있음을 알고 있지?
언제나 다정했던 언니야 . . 사랑하는 나의 언니야 . . . .
이젠 그만 갈께 , 안녕 !
////뉴욕한국일보 <2013년 생활 수기> 쓴 이 - 전금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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