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비호· 애와증/나의 기쁨, 슬픔

<모든 뜨거운 사랑은 죄다 ~ 탄식으로 끝난다 . . >

다음에는 2013. 2. 5. 03:22

 

 

 

 

 

Schuman(1810-1856)

장인이 될 사람과 재판까지 하는 우여곡절 끝에

30세가되는 1840년에  아홉살 연하의 클라라와 결혼합니다

 

슈만의 봄은

이렇게 활기차게 시작되었지만

그의 말년은 정신병으로 불우하게 마칩니다

 

 

 

 

 

    -  김 정운의 "남자의 거시기" 중에서-

 

 며칠 전 부터 -  동행한 이 봉기 사장은  슈만의 가곡 < 헌정 Widmung>을 흥얼거린다.

" Du meine  Seele, du mein  Herz ( 너는 나의 영혼,  너는 나의 심장 . . . . . )

 

그가 부르는  가사는 매번 딱 거기까지다 . .  그 다음 부터는 경음악(?) 이다 .   '  라 ~ 라~  라  ~ ! '  

슈만이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와의 법정 투쟁에서 승리한 후,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날 밤,  

그 벅찬 감동을 노래한 것이라는 설명을 벌써 몇번째 반복한다.   

그러나 그가 지금 슈만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님을 나는 안다.

2년전, 위암 수술을 받은 뒤로는 매일 아침 눈 뜰 때마다 살아 있는 게 그렇게 감사할 수 없다는

바로 자신의 노래였다.

 

위암을 이겨낸 삶에 대한  감사와 슈만의 기쁨은 그렇게 섞여 있는 것이다 . 

그는 여행내내 야채만 먹고 다니며  슈만의 노래를 불렀다 .

매번 경음악으로 . .

 

내게 . . 겨울은  슈베르트이다..  봄이 되여야 슈만을 듣는다 ..

특히 연가곡< 시인의 사랑> 의 처음 곡인 < 아름다운 오월에 > 는 내 애창곡이다.  'Im wunderschonen Monat Mai . . .  '

나 역시 이 다음부터는  경음악이다.

독일의 겨울은  혹독하게 슬프고 우울하다. 

습기가 가득한 한기는 뼛속 깊숙히 파고든다..   다른 계절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다.

 여름에도  우박이 내리고 한나절에 눈과 비,  해와 바람을 다 겪기도 한다 ..  그러나 오월은 다르다..

 

 

일년 열두 달  중, 유일하게 따뜻함이  계속되는 계절은  오월이었다, 

들 뜬 여인들은 풀밭으로 나와 웃옷을 벗어 젖힌다.  유학시절,  공원 가운데로  자전거를

타고 가며 그 풍만한 장관에 눈을 떼지 못하다  자동차에 치인적도 있다. . . 

오월의 따뜻한 햇살은 여인들의 풍만한 가슴을 통해 온다.

그러니, 어찌 오월에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 내리는 아우토반을 5시간 달려  우리가 라이프치히로 올라온 것은 단지 슈만의 집을 보기 위해서였다 . .

라이프치히는 바흐의 도시다 ..  그러나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서양음악의 아버지로 기억될 수 없다.

슈만 역시 멘델스죤이 신경 써주지 않았다면 . . 라이프치히에서 제대로 된 음악활동을 할 수 없었다 . .

슈만보다  한 살 위인 멘델스죤은 자페적 성향의 슈만이 음악계에

자리 내리도록  도움을 주었다 .

 

오늘 날 라이프치히는 바흐, 멘델스죤 ,  슈만의 도시로 기억된다 .

아쉽게도 슈만의 곡을 연주하는 음악회는 우리의 일정과 맞지 않았다 .

우리는  인젤 슈트라세 18번지에 있는 슈만 하우스를 찾았다 . .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기 시작한  바로 그 집이다 . 

슈만은 후에  이렇게 적었다.

"인젤 슈트라세,  난 거기가 너무 좋다,   그곳에서 난 아무것도 필요없었다." 

얼마나 행복 했을까 . . .

입장료를 내고 들어서려니 . .  내 사진기를 보고는  사진을 찍으려면  1유로를 더 내야 한단다.  

우리는 기대를 갖고  건물안으로 들어섰다 .  이런, 그 집에는 슈만을 기억할 만한  어떤 물건도 없었다 . .

여러 곳에서 복사해온 슈만과 클라라의 사진 만 벽에  빙 둘러  붙어 있을 뿐이었다.  

 방 한 가운데에는  낡은 그랜드 피아노 한대만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그 피아노 역시  슈만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  단지   비슷한 시대에 만들어 졌을 뿐이다 . .

 이 사진 한 장 찍는데 1 유로를 더 낸 것이다 .

꼭 이런식이다.

1949년 에서 1990년까지  41년간 지속되었던  동독 사회주의는 통일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식으로 사람을 좌절케 한다. 

사회주의는 통일된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런식으로 사람을 좌절케 한다. 

사회주의에서 교육받은 이들이 자본 주의의 껍데기만 배운 까닭이다. 

 뭐든 명목을 붙여 돈만 받으면 된다는 생각이다.  상풍의 가격과 가치가 도무지 일치하지 않는다.

도대체 슈만이 생전에 쓰던 물건이나 그에 관한 기록들은 어딜 가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 . 

 츠비카우- ZwikKau에 가야 한단다.  

그곳에 가면 슈만의 생가가 있다는 것이다 .

이튿날 . .  눈길을 헤집고  바로 츠비카우로 달려갔다 . .  

아 , , 난 입구로부터 또 좌절했다 . .  사진을 찍으려면 입장료의 몇 배가 되는  16유로를  내야 한단다 . .

내부의 전시 내용은 라이프치히의 슈만하우스에 비하면 훨씬 충실했다 . .

그러나 단지 이 단출한 전시품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건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 . 

돈을 지불 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가치를 내 놓아야 한다는 시장의 기본 원칙은 여기서도 무시되었다..

과거 40년의 사회주의 사고방식은 똑같은 40년의 세월이 지나야만 바뀔듯하다 .

그날 저녁,  라이프치히 호텔로 돌아와 챙겨온 슈만에 관한 자료를 꼼꼼하게 읽었다 . . 

슈만의 삶의 생생한 기록들을 읽으며 난 홍상수의 영화에 나오는 바겁한 사내들이 자꾸 떠 올랐다 . .

홍상수가 만든 모든 영화의 남자주인공들은  일사 분란하다.   오직 ' 어떻게 한번 해볼까 만 궁리한다 . . 

그리고 여자가 몸 또는 마음을 주는 순간 돌아선다.

갖가지 이유를 대며 . . . .

 

 

슈만도 그랬다 . .  일단 도무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지속되질 않았다 . .

클라라와의 결혼도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가 지독하게 반대 했기 때문에 그토록 강렬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순조로웠다면 절대 클라라와 결혼 하지 않았을 것이다 . . 

결혼을 위한 법정투쟁이 지속되는사이에도 슈만은  끊임없이 다른 여자들을  만났다 .   

남자들과도 사랑을 했다.  클라라와 사랑의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도

\ 다른 한편으로는 괴테의 손자 발터 폰 괴테와도 사귀었다. .  

아주 비겁한 짓도 했다 . . 

돈 많은 공작 가문의 딸.  에르네슈타인과 사귀어 경제적인 혜택을 받으려다, 그 여인이 

그 집안에 입양된  어붓 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바로 걷어 차 버린다  . .  틈틈이 오래된 여인과의 성관계를 지속하다 매독에 걸리기도 한다 . . 

평생 열등감과 정신적 피로감에 술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 

이런 황당한 남자와 그 똑똑한 클라라가 결혼을 한 것이다 . .  클라라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었다 . . .

10대 초반 부터 알고 지낸  아저씨와의 결혼생활에서 클라라가 행복했던 적은 거의 없다 . . 

라이프치히에 신혼생활을 꾸ㅡ렸던 1840년, 오직  그 해만 행복했다. . 슈만도 행복했다.

슈만의 위대한 피아노 작품들은 대부분 그 기간에 쓰였다. .  특히 < 시인의 사랑 > 을 비롯한 가곡들은

1840년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그게 전부였다 .

이후의 결혼 생활은 행복과는 전혀 상관 없었다 . .

슈만을 너무 잘 알고 있던 아버지 비크가 저주하며 예언했던 그대로다. .

클라라는  슈만과의 결혼 생활을 너무 힘들어 했다 . .  슈만은 클라라가 피아노 연습을 하면 

작곡에 집중할 수 없다면 짜증을 냈다 . .

결혼 전,  천재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던 클라라는 슈만과의 사이에서 일곱명의 아이를 낳으며 

아이들 교육에 몰두해야 했다 . . 

간간히 피아노 연주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매번 동행한 슈만과 싸웠다

슈만은 아름답고 뛰어난 아내를 너무 힘들어 했다 . . . 

그러다 결국 그는 미쳐버려 강물에 뛰어든다 . .  매독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정신 병원 에서 쓸쓸하게 죽는다.

오늘 날 우리가 기억하는  슈만과 클라라와의 위대한 사랑은 모두 클라라의 자작극(?)이란 이야기이다 . .  

 클라라는  슈만이 죽은 뒤, 40년을 더 살았다.  

너무나 현명하고 아름다웠던 여인 클라라는 자신의 철없던 선택과  그 이후의 삶을 어떻게든  정당화 해야 했다 . .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슈만의 작품을 알리고 지속적으로 연주하며 그를 위대한 작곡가로 기억하게 하는 일에 몰두했다 ..  .  

그래야만 클라라 자신의 삶에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었다 . .  

젊은 청년 브람스의 그 뜨거운 사랑도 거절해야만 했다 . .

그래야만 자신의 지고지순한 사랑이 정당화 되는 까닭이다. 

 

클라라의 짦은 사랑과  평생의 고통에 내 생각이 다다르자 난 갑자기 호텔 밖으로 나가고 싶어졌다 . .

답답했다..

슈만의 가곡이 나오는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라이프치히의 밤거리로 나섰다 . . 

 

클라라도 밤마다 이 거리를  울며 걸었을 것이다 . .

 <시인의 사랑> 중 일곱번째 노래,  < 난,  탄식하지 않으리  Ich grolle nicht > 가  그렇게 절절할  수 없었다. . .

그 노래는  사랑의 노래가 아니었다 . .

평생에 걸친 클라라의 애절한  탄식을 예언하는 노래였다 . .

 

아 . .  .    지구상의  뜨거운 사랑은 죄다 . . 탄식으로  끝난다 . . .

 

 

 

<김 정운이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화 심리학 -  "남자의 물건"  p119 - p124 에서 옮김>